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케임브리지 대학교 (문단 편집) === 타운 앤드 가운 === || {{{#!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6px" [[파일:Market Square.jpg|width=100%]]}}}|| || '''▲ 대학 중앙교회[*A 그레이트 세인트 메리 교회(Great St Mary's, the University Church)]에서 내려다본 시장 광장''' ||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더럼 대학교]],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등 [[대학도시]]에 위치한 오래된 대학들에서 지역 주민과 대학 간의 관계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 때 지역 주민 공동체는 "마을"이라는 뜻의 "타운(Town)", 대학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흔히 입던 옷인 "[[가운]](Gown)"이라고 불렀으며, 이들 간의 관계는 "타운 앤드 가운(Town and Gown)"이라 불렀다. [[중세]] [[서유럽]]의 [[대학]]들은 분리된 교정이 존재하지 않고 해당 도시와 섞여서 존재했다. 따로 [[기숙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도시 내에서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고, 따라서 기존 도시의 상업시설, 인프라 등에 의존했다. 그러나 당시 대학은 중세 서유럽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던 [[가톨릭]]의 성직자를 교육하고 재정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시민법이 아닌 교회법을 적용 받았고, 해당 지역 정부의 입법, 사법, 행정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게다가 당시 서유럽(특히 종교계와 학술계)의 [[링구아 프랑카]]가 [[라틴어]]였기 때문에 대학 구성원들도 라틴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지역 주민들은 당연히 라틴어를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규모와 영향력이 커지고, 교직원이나 학생들이 [[길드]]를 조직해 대학의 이권을 챙기는 활동을 하기 시작하자 지역 주민들은 대학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역 주민의 불만은 1209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분란이 일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탄생의 계기가 된 사건,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 때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민중에게 습격 당한 사건 등으로 분출된다. 특히 와트 타일러의 난은 [[중세 흑사병]] 팬데믹 이후 서민층의 입지가 높아진 것을 잉글랜드 상류층이 저지하려 하자 화가 난 서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는데, 케임브리지에서는 시민들이 모여 지도자를 선출하고 주요 교수의 집, 코퍼스 크리스티 컬리지의 올드 코트, 기타 대학 건물, 그레이트 세인트 메리 교회 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민중들은 교회에 있던 대학 공용 금고 등에서 모은 서류를 도심의 시장 광장(Market Square)에서 2일 동안 불태웠는데, 이 때 부른 구호인 "서기 놈들의 교육 따위는 그만 두어라!(Away with the learning of clerks, away with it!)"가 유명하다. 와트 타일러의 난 이후에는 치안 안정화를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에게 피의자 기소권 등 케임브리지 시의 무역, 정치, 경제에 관한 많은 권한이 주어졌으며, 16세기에는 지역 주민들과의 합의로 학생 생활 여건 개선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1630년 [[페스트]] 유행 때 컬리지들이 문을 걸어잠그고 지역 주민을 돕지 않자 다시 크게 악화됐다. 다행히 현대에 들어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영향으로 [[케임브리지셔]] 일대가 실리콘 펜(Silicon Fen)이라는 첨단산업 중심지가 되어 1960~2010년 사이 1,500여 개의 회사와 40,000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내는 등 지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타운 앤드 가운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